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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아의 소설향



우련 붉어라-05 소설연재




혼곤지절(昏困之節 혼곤한 계절)

 

 

 

종호는 매화주가 담긴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치영을 그림자처럼 보필하라는 아버지 변인몽의 명에 따라 술자리에 동석하고도 마음자락은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강무혁, 그자가 하필 그 시각 그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곤란에 처한 운해 앞에 멋지게 등장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는 분함보다 무혁의 존재 자체에 더 신경이 쓰였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같은 스승 아래서 함께 글을 배우고 검을 겨누며 활을 쏘았다. 하지만 무엇을 해도 언제나 무혁이 으뜸이고, 종호는 반걸음 뒤쳐져 쫓아가는 형국이었다.

밤잠 못 자며 기를 쓰고 노력해도 반걸음의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서출 딱지가 붙은 종호이기에 이미 태생부터 무혁에게 한참 뒤쳐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종호는 술로 텁텁한 입 안을 헹구었다. 제아무리 술잔을 부어재껴도 목구멍은 여전히 까슬까슬 텁텁하기만 하였다.

왜 그러나?”

치영이 주안상 너머에서 물었다. 종호는 머릿속 사념을 황급히 털어 냈다.

?”

어디 불편한가?”

잠시 딴 생각을 하였습니다.”

술잔을 연거푸 비우면서 하는 딴 생각이라……. 여인네로군.”

치영이 종호의 빈 잔을 채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종호는 새삼 등줄기를 단정하게 곧추세우고 앉아 치영이 따라 주는 술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닙니다.”

자네 마음을 앗아간 여인네가 누군가?”

아무도 아닙니다.”

딱 보니 남녀상열지사 맞는데, . 여인네 문제만큼은 내 눈을 절대 못 속이지.”

송구스럽습니다.”

종호가 고개를 숙이자 치영이 껄껄껄 호탕한 웃음소리를 쏟았다.

사내가 여인을 탐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 공연히 몸 달 것 없네. 어느 기방의 어느 기녀인지 말만 하게. 그년 해웃값은 내가 자네 대신 후하게 치러 줄 것이니.”

고맙습니다.”

재차 부정하는 꼴도 우스울 성싶어 종호는 두루뭉술하니 받아넘겼다. 한껏 기분이 오른 치영이 웃는 낯으로 종호에게 술을 권하였다.

쭉 마시게. 지난 영묘(영조대왕) 때 협객 김홍연은 말술을 마시고도 기생 둘을 안고 담장을 날아서 넘었다지. 자고로 사내라면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 해.”

맞습니다. 국별장(局別將, 훈련도감의 정 3품 관직) 영감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십니다.”

여태 잠잠하던 명수가 치영과 종호의 대화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거나하니 취기가 오른 명수의 낯빛이 유독 불그죽죽하다.

자네 둘 오늘 초면이지?”

, 국별장 영감.”

내 정신 좀 보게. 서로 인사시킨다며 한자리에 불러 놓고 깜빡 잊었지 뭔가. 우리 연심이 속살맛에 나도 모르게 취했나 보네.”

치영이 옆구리에 끼고 앉은 기생 젖가슴을 대놓고 조몰락거렸다. 연심이 허리를 배배 비틀어 꼬며 코맹맹이소리로 아양을 떨었다.

영감! 어린 공자들이 봅니다. 이년 부끄럽게 왜 자꾸 이러십니까.”

싫다는 년이 허리는 왜 비트누?”

아잉. 이년이 언제 싫다고 하였습니까. 부끄럽다 그랬지요.”

내가 이래서 연심이 너를 좋아하는 거다. 도도한 척 내숭이나 떨고 앉은 다른 년들이랑은 확실히 다르거든.”

치영의 칭찬에 연심이 한층 더 세차게 허리를 꼬았다. 그대로 치영의 가슴팍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치영은 바투 연심을 끌어안고서 치맛자락 속으로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허벅지 맨살을 훑고 올라 사타구니 속살을 함부로 뭉그러트렸다. 연심이 교태 섞인 한숨을 달짝지근 토하였다.

좋으냐?”

. 오늘밤 이년은 오롯이 영감 것이옵니다.”

아이고, 요 예쁜 것!”

치영이 쪽 소리가 나도록 연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헤실바실 웃는 얼굴을 종호와 명수 쪽으로 되돌렸다.

서도 인사들 나누게. 둘이 연배가 비슷하니 앞으로 좋은 벗이 될 것일세.”

치영의 말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명수가 먼저 종호에게 짤막한 목례를 보냈다.

오명수라 하오. 우리 잘 지내봅시다.”

남산골 오달영 행수의 큰아들일세.”

치영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종호는 고개를 끄덕여 명수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달갑지 않은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집안의 가진 돈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명수 같은 부류를 본래 좋아하지 않았다.

변종호요.”

우포청 변인몽 종사관의 자제일세. 변 종사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 부친 되시는 병판대감의 수족이나 다를 바 없지. 이 친구 역시 내가 곁에 두고 수족처럼 부리고 있고. 젊은 나이에 무예가 절륜하다네. 조선 팔도에 대적할 자가 몇 없을 것이야.”

과찬이십니다.”

종호는 치영을 향해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아버지 인몽이 양반가 서출인 탓에 가문은 미천하고, 집안의 가진 재산 역시 넉넉한 편이 아니다. 입신양명을 꿈꾸는 종호로서는 뒷배가 되어 줄 치영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겸손함까지 겸비한 인재…….”

치영의 이야기 소리가 중간에서 멈추었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격자살 미닫이가 벌컥 열렸기 때문이다. 누가 기방 안으로 난입을 하였다.

국별장 영감!”

눈 깜짝할 사이 안으로 뛰어든 둔봉이 넙죽 큰절을 올렸다. 이마가 방바닥을 짓찧었다. 몸을 낮추어 납작 엎드린 둔봉의 등줄기로 격양된 명수의 목소리가 우르르 쏟아졌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난입을 하느냐. 네깟 놈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렷다. 썩 나가지 못할까.”

명수가 펄쩍펄쩍 뛰는데도 둔봉은 요지부동이다.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린 채 거듭 치영을 불렀다.

영감마님!”

저런 하찮은 놈과 말 섞을 일이 무에 있겠습니까. 아랫것들을 시켜서 당장 내쫒도록 하겠습니다. 국별장 영감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명수가 주안상 건너편 치영의 안색을 살피더니 목청을 높여서 중노미(음식점이나 객잔 등에서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남자)를 찾았다.

여봐라! 게 밖에 누구 없느냐?”

그냥 두게.”

치영이 한쪽 손을 들어 명수를 말렸다.

하오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명수를 바라보는 치영의 눈빛이 서름하였다.

아무래도 저놈이 나한테 긴히 할 말이 있나 보네.”

치영의 이야기를 허락으로 알아들은 둔봉이 대뜸 억울함을 호소하고 나섰다.

쇤네 분하고 원통하옵니다. 일을 시켰으면 대가를 치르는 게 올바른 상례 아니겠습니까. 이놈 죽을똥 살똥 일만 하고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치영이 엄중한 태도로 물었다. 명수가 자신이야말로 진짜 억울하다는 양 오만 인상을 죄다 찌푸렸다.

저놈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하였습니다. 일을 안 한 놈에게 웬 돈입니까.”

한창 재미지게 노는 판에 강무혁이라는 자가 끼어들었지 뭡니까. 어쩔 수 없이 종치고 말았습니다.”

둔봉이 상황을 부연하였다.

네 이놈! 아까부터 그놈의 강무혁 타령만 늘어놓는데, 네놈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 아니냐. 누구를 핑계거리로 삼는 것이냐.”

명수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가뜩이나 술기운에 불그죽죽한 낯빛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랐다. 숯불을 올려놓은 것 마냥 검붉게 변하였다.

치영은 품속의 연심을 저만치 떼어 놓고 흐트러진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한차례 어깻숨을 흘리는 치영의 오른손이 무심코 콧잔등이로 향하였다. 다섯 해 전에 부러졌던 코뼈가 다시금 욱신욱신 아팠다.

강무혁이라……. 우포청 포도대장 강대건의 아들놈 말이더냐?”

, 맞습니다요. 바로 그놈입니다. 칼 다루는 솜씨가 귀신같았습니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고하라.”

우포장 영감의 아들을 건드려 좋을 게 없겠다 싶어 중간에서 일을 접었습니다. 그깟 계집년 혼꾸멍내는 일이야 언제든 다시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요.”

네놈 실력이 부족하여 일을 그르친 것이렷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명수가 분기탱천하여 호되게 둔봉을 꾸짖었다. 치영의 좁다란 미간 위로 신경질적인 주름이 줄지어 늘어섰다.

아무리 저놈이 강무혁이 무서워서 칼자루를 거두어 들였을까. 그 뒤에 버티고 앉은 강대건 영감이 두려웠던 게지.”

저런 하찮은 놈의 거짓말에 속으시면 아니 되십니다.”

어허! 한 번 실수는 병가상사(兵家常事)라 했네. 아랫것들에게 너무 박하게 대하면 그것도 어찌 보면 허물이야. 심부름을 제대로 못하였다고는 하나 저놈 딴에는 목숨 걸고 일을 감행하였을 터. 심부름값 줘서 그만 보내게.”

국별장 영감!”

어서 돈 줘서 보내래도.”

치영의 단호한 채근에 명수가 마지못해 허리춤 두루주머니를 열었다. 엽전 세 뭉치가 머리를 조아리고 앉은 둔봉의 발치 아래 아무렇게나 날아가 나뒹굴었다.

영감마님! 백골난망이옵니다. 언제든 이놈 불러만 주십시오. 성심을 다하여 모시겠습니다요.”

둔봉의 이마가 방바닥을 짓찧고 다시 또 짓찧었다. 치영이 껄껄껄 소리를 내어 웃어젖혔다.

나를 위해 네놈 목도 내놓을 수 있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이놈 목숨은 이제 영감마님의 것입니다.”

둔봉이 한 번 더 허리 숙여 인사하고 기방을 나섰다.

격자살 미닫이가 닫히고 반 식경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치영이 말없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종호 쪽으로 가벼운 눈짓을 보냈다. 종호는 지체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잠자리에 들 시각에 웬 주안상을 보라고 하셨습니까?”

지이는 남편의 술잔 안에 매실주를 채우며 넌지시 잔소리를 흘렸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달영이 일장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속이 답답하여 술이라도 마셔야 잠이 올 듯하오.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소.”

방도가 전혀 없습니까?”

있으면 이렇게 손 놓고 있겠소? 뭘 해도 진즉에 하였지.”

소첩이 내일 오라버니를 한 번 더 찾아가 보겠습니다.”

일없소.”

달영은 씁쓸한 코웃음을 쳤다. 지충이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는 오래 전에 접었다. 지금껏 운종가 시전 행단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해 왔다. 그런데 그깟 돈 십만 냥을 못 주겠다니……. 다시 생각해도 섭섭하기만 하였다.

급전 융통해 달라는 부탁도 일언지하에 내쳐졌고, 명진이를 양자로 들이는 일 역시 거절당하지 않았소.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오.”

마냥 손 놓고 있다가 이대로 길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당신 오라비한테는 아니오!”

참다못한 달영은 고함을 쏘았다. 요즘 들어 신경이 꽤나 날카로웠다. 하루하루 돈을 갚아야 할 날이 다가올수록 입이 마르고 속이 타들어갔다.

하필이면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해 버릴 것은 무엇인지.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큰돈을 만져 볼까 싶어 고리채까지 끌어다 투자를 하였다. 이문은커녕 본전까지 꼴딱 날리고 말았다.

오라버니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달라지기는 개뿔! 오히려 화만 더 돋우는 꼴이 될 것이오. 윗선과 결탁해 동래 왜관과 왜국을 오가는 상선에 투자하였다가 일을 그르쳤노라고 하면, 당신 오라비가 뭐라 할 것 같소? 애초 하지 말라는 짓을 몰래 한 것인데. 잘하였다 칭찬이라도 하면서 그 돈을 물어 줄 것 같으오?”

병판대감 댁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식도 없습니까?”

지이는 조심스럽게 물은 뒤 달영의 기색을 살폈다. 가뜩이나 어두운 남편의 얼굴이 점점 더 사색이 되었다.

병조판서 김일순의 말 한마디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지는 시절이었다. 대전보다 태화정 병판대감 집터가 더 높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일순의 뒤에 중궁전과 국구(왕비의 아버지) 김조순이 버티고 앉았음은 조선 팔도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였소. 우리가 쪽박 찼다는 것을 김 대감 쪽에서 알게 되는 날에는 나나 부인이나 목숨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오. 명수와 명진이까지 화가 미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터.”

달영이 깊은 탄식을 토하였다. 지이도 덩달아 한숨을 지었다. 부부의 목숨이 풍전등화인 것도 문제지만 자식들 걱정에 애간장이 녹았다. 어떻게든 두 아들을 살리고, 남편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한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지요. 그것만이 살길이라면 물어뜯어야지요. 죽을힘을 다해서.”

지금 병판대감과 척을 지자는 말이오? 그러고도 우리가 살기를 바라겠소?”

여기서 병판대감이 왜 나옵니까. 그 어른은 우리 집안의 든든한 뒷배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소. 고양이를 물어뜯자고 하더니, 병판대감은 우리 뒷배라 하고. 그러니까 고양이가 대체 누구라는…….”

달영은 잠시 이야기 소리를 그치고 술기운에 탁해진 눈자위를 실룩거렸다. 짚이는 구석이 딱 하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당신 오라비가 아니오?”

오라버니를 물어뜯지 않으면 서방님과 소첩이 죽습니다. 우리 아들들이 죽습니다.”

부인에게 무슨 비책이라도 있소?”

.”

지이는 주위를 세심하게 살핀 다음 귀엣말을 속닥였다. 화들짝 놀란 달영의 상체가 휘청 흔들렸다. 혼비백산한 달영의 손발이 벌벌 떨렸다. 달영은 무의식중 왼쪽 가슴패기를 움켜잡았다.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그 일이 가능할 것 같소?”

가능하게 만들어야지요. 전에 장돌 아비 말이 오라버니가 열흘에 한두 번은 혼자 밤이슬을 맞는다 하였습니다. 천주학 때문일 것입니다. 잘만 이용하면 우리 쪽에 승산이 있습니다.”

여인네를 숨겨 두었을지도 모르잖소?”

여인네 때문이라면 고작 열흘에 한두 번뿐이겠습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이슬을 밟았겠지요. 아니면 진즉 안채로 들여앉혔든가요.”

자칫 우리가 죽을 수도 있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얄팍하게 일렁이는 촛불 속에서 지이의 얼굴 가득 대단한 결의가 엿보였다. 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이의 계략이 맞아 떨어지기만 한다면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완전히 씻어 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지충의 어마어마한 재산까지 덤으로 차지하게 될 터였다.

제대로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둘만으로는 어림없소. 구린 일을 처리해 줄 이가 반드시 필요하오.”

저잣거리 왈짜들 중에는 적당히 돈만 쥐어 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자가 숱합니다. 업길이라는 자도 그런 자들 중 하나이지요.”

믿을 만한 자요?”

막돼먹은 무뢰배한테 신의 따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돈이 그 자의 입을 막을 것입니다.”

하기야 돈만큼 확실한 것도 없지. 이래저래 재물이 꽤 들겠군.”

얼마간의 손실은 각오해야지요. 일만 성사되면 그 많은 재산이 죄다 우리 것입니다. 기백만 냥은 족히 넘을 텐데 그깟 돈 몇 푼이 대수겠습니까.”

빙긋이 미소 짓는 지이의 면면에 탐욕만이 가득하였다. 무릎을 마주 대고 앉은 달영의 입가에도 걸태질로 찌든 웃음기가 넘쳤다. 백만 냥이면 조선 팔도의 상권을 좌지우지하고도 남는 큰돈이었다.

 

***

 

나비야 청산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가자.”

둔봉은 한때 시정바닥을 풍미한 시조가락을 흥얼거렸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뚝우뚝 솟은 비탈길을 기분 좋게 내려갔다. 치영의 배려 덕분에 홀쭉하던 주머니가 제법 든든해졌다. 이 돈이면 한동안 뱃속 역시 든든할 것이다.

낄낄낄 낄낄낄.

흥에 겨운 웃음소리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불룩한 두루주머니를 손바닥으로 툭툭 쳐 보았다. 엽전 부딪치는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깨우며 차랑차랑 울렸다. 백화루 소리기생 옥선의 간드러진 노랫가락보다 수십 배는 듣기 좋았다.

신바람이 난 둔봉은 다시 낄낄낄 웃었다. 신명난 장단을 치듯이 한차례 더 두루주머니를 두드렸다. 차랑차랑 기분 좋게 울리는 돈 노랫소리에 헤벌쭉 입이 벌어졌다.

그때 느닷없이 머리카락이 쭈뼛 솟았다. 모골이 송연하였다. 선득한 기운에 이끌려 둔봉은 후다닥 뒤를 돌아다보았다.

올빼미 한 마리가 사위스러운 날갯짓을 퍼덕이며 솔숲 이편에서 저편으로 후드득 날아간다.

! 재수가 없으려니…….”

어디서인가 홀연히 나타난 시커먼 인영이 둔봉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둔봉은 재빨리 허리춤에서 칼부터 빼 들었다.

웬 놈이냐?”

국별장 영감으로부터의 전언일세.”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새카맣게 차려입은 사내가 말소리를 입 밖으로 밀어 냈다. 복면을 한 탓에 목소리가 혼탁하게 갈라졌다. 둔봉은 칼자루를 거두어들이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인기척 좀 하고 다니시오. 이녁 때문에 간 떨어질 뻔 했잖소. 국별장 영감께서 나한테 긴히 심부름시킬 일이라도 있다 하시오?”

한 번 실수는 병가상사. 허나, 용서할 수 없는 실수도 있는 법이니…….”

생존본능에 따라 둔봉은 다시 칼자루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나 옆구리 칼집에서 검은 꺼내 보지도 못하였다. 그대로 땅바닥에 풀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짧은 순간, 검은 옷의 사내는 수평으로 세운 호신용 대모장도로 둔봉의 가슴팍을 잇달아 세 번이나 찔렀다. 지난날 검선으로 불리던 김광택에 버금가는 솜씨였다.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둔봉의 왼쪽 가슴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온다. 사방으로 퍼지는 선혈을 둔봉은 그저 몽롱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감히 술자리에 난입하여 행패를 부리는 것이렷다.”

사내의 혼탁한 말소리가 우두커니 앉은 둔봉의 정수리를 타고 차갑게 떨어졌다. 둔봉은 나오지 않은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짰다.

누구냐, 너는?”

, 비릿한 웃음소리가 대답보다 먼저 들렸다.

이제 곧 죽을 자가 내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려고?”

누구냐?”

강무혁.”

둔봉은 점점 흐려지는 눈자위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훌쩍한 신장, 다부진 어깨, 자유자재로 칼을 다루는 솜씨까지 여러 면에서 무혁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야차 귀신 강무혁은 아니다.

칼자루를 쥔 다섯 명을 상대로 흑각궁을 검처럼 휘두르면서도 무혁은 일절 살기를 띄지 않았다. 지금 눈앞의 사내 주변에는 온통 지독한 살기만이 흘렀다.

누구냐…… 너는?”

칼솜씨는 젬병이더니 그나마 눈썰미는 있군.”

죽여라. 커억, 어서.”

둔봉은 말라비틀어진 고목 등걸에 맥없이 풀린 등줄기를 가까스로 기대고 앉았다. 가빠지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가슴팍에서 뿜어져 나온 핏줄기로 몸뚱이가 통째로 피범벅이다. 주저앉은 땅바닥 역시 흘러내린 선혈로 흥건하다.

아우우우우.

더운 피비린내를 맡은 날짐승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깊은 산중을 휩싸고 도는 적막을 깨트렸다.

네놈의 마지막 명줄은 저것들이 알아서 끊어줄 터.”

사내가 칼끝에 묻은 핏방울을 둔봉의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서 닦았다.

짐승의 먹잇감으로…… , 던져 주더라도…… 허억, 먼저 목숨은 끊어주는 게 도리…….”

저놈들에게서 사냥하는 재미를 빼앗을 수는 없지.”

대모장도를 도로 칼집에 꽂아 넣는 사내의 눈가로 얼어붙은 미소가 지났다. 둔봉은 몸 안에 남은 마지막 힘을 최대한 끌어 모아 소리쳤다.

살인귀!”

변종호.”

뭐라…….”

끝내 의식을 잃은 둔봉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네놈은 그 더러운 손을 소저에게 대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하였으면 고통 없이 보내 주었을 것을.”

종호는 훌쩍 몸을 날려 소나무 위로 올라섰다. 울울창창한 솔숲 이 나무에서 저 나무를 향해 빠르게 날았다.

종호의 등 뒤로 피에 굶주린 맹수의 포효와 생살을 찢기는 고통에 울부짖는 둔봉의 비명이 아스라이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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