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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아의 소설향



우련 붉어라-04 소설연재




풍림화산(風林火山 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고요하게 불길처럼 맹렬하게 태산처럼 무겁게)

 

 

 

향이가 끙끙거리면서 국밥이 든 나무들통 손잡이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운해는 후다닥 나무들통 쪽으로 팔을 뻗었다.

같이 들자.”

됐어라.”

입으로는 괜찮다 하면서도 향이는 나무들통 손잡이로 다가서는 운해의 손길을 막지 않았다.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고 싶은 향이의 본심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운해는 모르는 척 나무들통 손잡이를 손바닥 안에 그러쥐었다.

혼자 들면 무겁잖아.”

우리 엄니한테 이년 맞아 죽어요.”

유모 모르게 하면 되지.”

우리 엄니 눈치가 귀신이어라.”

너도 나도 입 다물면 유모 눈치가 아무리 귀신이라도 몰라. 수표교 근처까지만 같이 들고 가자.”

운해의 제안이 딱히 싫지만은 않은 듯, 어쩌면 기다렸다는 양 향이가 헤헤 웃었다.

아기씨가 같이 들어 주시면 이년이야 한결 편하고 좋지요.”

둘이서 드니까 가볍다. 그치?”

당연하지라.”

이래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는가 봐.”

아기씨. 지난번 그 일 말이어라.”

향이가 새삼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야기하였다. 대충 짚이는 구석이 있는 운해는 조곤조곤 말소리를 풀었다.

명수 오라버니 일 말이지?”

. 남산골 나리께 말씀드리셨어라?”

엊그제 운종가 만물상으로 나오셨기에 이야기했어. 고모부님께서 많이 놀라시더라. 명수 오라버니가 불량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는 줄은 까맣게 모르셨던 모양이야. 밤늦도록 과거공부에 열심이라고만 생각하셨나 봐.”

운해의 입술을 뚫고 거붓한 숨 자락이 새어 나왔다. 며칠 전 운종가 한복판에서 명수와 맞닥친 일이 떠올랐다. 가슴 언저리가 저절로 갑갑해졌다.

그냥 모르는 척하지 그러셨어라.”

그러면 도리가 아니지. 어울리는 무리가 단순 무뢰배 왈짜패도 아니고, 딱 보니까 검계(조선시대 조직 폭력배)던데.”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어라.”

향이 너도 보았잖아. 다들 옆구리에 칼 찬 것.”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날 명수 도련님이 그러셨잖아요. 남산골 나리나 마님께 고해바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냥 겁주려고 하는 으름장이야. 명수 오라버니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내 입을 막고 싶을 테니까. 고모님이나 고모부님이 아시면 혼쭐이 날 게 빤하잖아.”

아기씨는 너무 순진하시어라. 요즘 저잣거리 검계가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시지요?”

향이가 일장 탄식과 함께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은근슬쩍 당하는 무시였다. 발끈한 운해는 목소리를 까칠하니 쏘았다.

나도 다 알거든. 검계가 기생집을 제 집 드나들 듯하고, 박장에서 노름으로 허송세월 한다는 것쯤은 안다고.”

이래서 아기씨가 순진하다는 것이어라.”

뭐어!”

그깟 오입질에 투전판에서 뒹구는 일은 새 발의 피라니까요. 그 잡것들이 괜히 옆구리에 칼 차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어라.”

오입질이랑 도박보다 더한 짓거리가 대체 뭔데?”

장사치들한테 자릿세 명목으로 돈 뜯어가는 것은 일상다반사고요. 시도 때도 없이 기방에 쳐들어가 행패 부리고. 심지어 얼마 전에는 벌건 대낮에 부녀자를 겁간까지 했대요.”

세상에! 관아에서 그 흉악한 짓거리를 보고만 있다니?”

운해는 벌어진 입이 차마 다물어지지 않았다. 향이가 말도 말라는 식으로 홰홰 손사랫짓을 쳤다.

검계 대부분이 명문세가 서얼이거나 돈푼깨나 만지는 집 자식이래요. 관아에서도 함부로 못 건드린다잖아요. 다들 무술까지 출중해서 포졸들을 찰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주무른대요.”

나라꼴이 어찌 되려고 여기저기서 파락호들이 판을 치는지 모르겠다. 오랜 기근으로 백성들은 먹고사는 일조차 힘겨운 마당에. 잘난 부모한테 기대어서 무리 지어 몰려다니며 갖은 행패나 일삼고 말이야. 큰일이다, 큰일.”

운해가 한숨을 쏟아 내자 향이까지 땅이 꺼져라 어깻숨을 쉬었다.

나라꼴 걱정하실 때가 아니어요. 아기씨야말로 큰일 났어라. 남산골 큰도련님이 이대로 당하고만 계시지는 않을 텐데. 그 괄괄한 성품에 분명 해코지를 하고도 남을 것이어라.”

명수 오라버니 그런 사람 아니야.”

그날 운종가에서 아기씨 팔목 잡아끌 때 보시었잖아요. 큰도련님 손목 안쪽에 난 무수한 생채기들. 고것이 죄다 칼자국이어라.”

운해는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명수의 손목에 난 상처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칼로 자해한 흔적이 틀림없었다. 운해는 답답한 심사를 부질없는 숨 자락에 실어서 뱉어 냈다.

명수 오라버니를 어쩌면 좋아. 어려서 장난이 심하기는 했어도, 누구를 해치거나 스스로를 해할 만큼 성정이 포악하지는 않았는데…….

얼라리. 못 보던 얼굴일세.”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 여럿이 운해와 향이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흘낏 보아도 저잣거리 왈짜패가 분명하다. 밑창에 징을 박아 만든 진신(비오는 날 진땅에 신는 가죽신) 끄는 소리가 딸깍딸깍 요란스럽다. 호사스러운 비단 전복 위 여봐란 듯이 허리춤에 찬 칼자루는 꺼드럭꺼드럭 호기롭다.

흉흉한 기근에 주막집 국밥을 들통으로 퍼 나르는 꼴이 돈푼깨나 있나 봅니다.”

작달만한 키에 살집이 투실투실 오른 왈짜가 일행 중 한 명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나름 공손한 말투였다.

업길아, 이러면 우리가 통행세를 안 걷을 수가 없지 않겠느냐.”

왼쪽 눈자위 아래 칼자국이 선명한 무뢰배가 이야기를 받았다. 왈짜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하였다.

옳으신 말씀이요, 둔봉 언니.”

음충맞은 무뢰배들을 피해 운해와 향이는 황급히 발길을 옆으로 틀었다. 왈짜패 역시 재바르게 움직였다. 도로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운해와 향이는 놀라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애꿎은 발만 동동거렸다.

요것들 봐라. 벌벌 떠는 꼴이 딱 비 맞은 참새새끼들 같구나.”

낄낄낄, 둔봉이라는 우두머리가 음흉스럽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를 쏟았다. 신명 난 업길도 덩달아 낄낄거렸다.

둔봉 언니! 이년 저고리를 먼저 벗길까요? 저년 치마를 먼저 들출까요?”

둘 다 벗기고, 둘 다 들추어 보자. 그래야 어느 년 속살이 더 쫄깃한지 가늠할 것 아니냐.”

흉악망측한 음담패설에 운해는 소름부터 끼쳐 올랐다. 본능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럼에도 힘을 내어 목소리를 다부지게 내질렀다.

대체 무슨 연유로 길을 막는 것이오?”

우리 아기씨가 누군 줄 알고 행패란 말이오. 운종가 시전 대행수 나리의 무남독녀요. 썩 저리 비켜나시오.”

향이까지 국밥이 든 나무들통을 땅바닥에 내려 두고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이고! 대행수 나리 따님이셨어요? 도도함이 하늘을 찌르셔서 쇤네는 영상대감 손녀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요.”

업길이 비꼬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대단한 농이라도 부린 양 혼자 좋다고 히쭉히쭉 웃어 대더니 돌연 정색을 하였다. 한쪽 팔을 들어 향이를 확 밀쳐 버렸다.

족히 열 근은 넘게 나가는 향이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저만치 흙바닥에 가서 곤두박질을 쳤다.

운해는 다급히 내달려가 향이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괜찮아?”

걱정 마시어라. 이년 말짱해요.”

향이가 양쪽 손바닥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 내며 제법 옹골차게 답하였다.

운해는 꼿꼿이 곧추세운 시선을 왈짜패 우두머리인 둔봉에게 붙박았다. 목울대 가득 핏대를 올려서 무뢰배들을 꾸짖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입니까? 길 가는 부녀자의 앞을 막무가내로 가로막고 서다니요.”

아녀자치고는 기개가 가상하구나.”

당장 저리 비키시오.”

좋아. 아주 좋아. 자고로 여자란 앙칼진 맛이 있어야 해. 앙탈을 부려 줘야 품는 맛이 쏠쏠한 법이거든.”

둔봉이 낄낄낄 예의 음충맞은 웃음소리를 자아냈다. 곁에서 업길도 낄낄거리며 칼자루를 칼집에 든 채로 휘둘렀다.

언니, 우리 이년 아랫도리 구경부터 합시다.”

운해의 다홍빛 치마가 불쑥 위로 들쳐졌다.

까악!”

소스라치게 놀란 운해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황급히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바로 그 순간 쌔앵 하며 화살 하나가 급작스러운 돌개바람처럼 날아왔다. 함부로 칼자루를 휘두르는 업길의 옷소매를 관통하였다.

당장 업길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업길을 대신해 둔봉이 바락 고함을 쳤다.

웬 놈이냐?”

그렇게 말하는 네놈이야말로 웬 놈이냐?”

근처 우뚝 솟은 참나무 꼭대기에서 벼락같은 목소리가 아래로 내리 꽂혔다. 둔봉은 고개를 높이 치켜들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끽해야 스물서너 살 남짓한 사내 녀석이 두툼한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다. 천하태평인 얼굴로 둔봉을 유유히 내려다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어린놈이 겁을 상실하였구나.”

송곳니 빠진 늙은 살쾡이가 감히 호랑이 행세를 하시겠다? 지나가는 동네 개가 웃을 일이로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맹랑하기도 하다. 높은 데 올라앉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느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훨씬 잘 보이기는 하다.”

이놈아, 뭐 모르고 날뛰다가 바지에다 오줌 지린다.”

네놈이나 피똥 싸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너 이 새끼! 당장 내려 와.”

둔봉이 벌겋게 낯빛이 달아올라 입아귀에 허연 거품을 물었다. 반면 젊은 사내는 한바탕 호탕하니 웃어젖혔다.

네놈이 여기로 올라올 수가 없으니 똥줄이 타나 보구나.”

오늘이 네놈 제삿날이 될 것이다.”

네놈 제삿날이겠지.”

젊은 사내가 땅바닥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정확히 업길과 운해 사이를 비집고 사뿐하게 내려섰다. 널찍한 뒷등으로 운해를 온전히 가려 왈짜들의 시선이 닿지 못하도록 막았다.

고맙습니다.”

운해는 보지도 못할 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젊은 사내가 어깨 너머로 비스듬히 시선을 두어 운해에게 일별하였다.

많이 놀라셨지요?”

아닙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젊은 사내가 호언장담을 쳤다. 그의 손에는 칼자루는커녕 화살도 없이 달랑 각궁 하나가 전부였다. 그것을 알아챈 둔봉이 잽싸게 허리춤에서 환도를 빼들었다.

어린놈이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러게 말이오, 언니.”

업길을 비롯한 나머지 왈짜들 역시 앞다투어 칼자루를 뽑았다. 젊은 사내가 각궁의 한쪽 끝을 양손으로 붙잡아 마치 검처럼 길게 각을 세웠다.

활 한 자루를 상대로 칼이 다섯이라……. 역시 송곳니 빠진 늙은 살쾡이는 어쩔 수가 없군.”

사내놈이 말이 많다. 양기는 주둥이로 뿜는 게 아니렷다.”

둔봉이 먼저 환도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젊은 사내는 정면으로 날아드는 둔봉의 칼날을 활대로 받아쳤다. 동시에 오른발을 위로 차듯이 들어 올렸다.

젊은 사내의 몸이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게 휘돌았다. 그는 등 뒤쪽에서 달려드는 업길의 왼쪽 어깨를 불꽃이 번지듯 맹렬한 기세로 내려쳤다.

으윽.”

업길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본능적으로 어깨부터 부여잡았다. 이미 칼자루는 저만치 던져 버린 후였다. 방금 젊은 사내가 휘두른 것이 각궁이 아닌 진검이었다면 벌써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절퍼덕 땅바닥에 주저앉은 업길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북북 문질렀다. 뭉뚝하니 휜 각궁을 마치 환도처럼 휘두르는 젊은 사내의 절제된 몸동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대다수 검객들은 세 번 나아가고 세 번 물러서는 명나라 검법에서 유래한 검보를 행한다. 그런데 젊은 사내는 칼자루를 대신한 각궁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서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태산처럼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며 한쪽 발을 허공중에 차듯이 올려 전후좌우로 몸을 빠르게 휘돌릴 뿐이다. 그럼에도 사방 어디 하나 빈틈이 없다. 적을 마주하여 숨조차 섣불리 내쉬지 않는다. 마치 무성한 숲인 양 그저 고요하기까지 하다.

젊은 사내가 한차례 길게 호흡을 골랐다. 두 손으로 각궁 끝을 쥔 채 활대를 왼쪽 어깨에다 얹었다. 오른쪽 어깨로 칼등을 짊어지고 상대와 마주하는 통상적인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와 확연한 차이가 졌다.

지금은 혁파되어 사라진 장용영(정조대왕의 호위 금군)의 무예별감들이 따로 훈련하던 본국검이 틀림없었다.

……강무혁.”

업길의 입에서 탄식 섞인 혼잣말이 터졌다. 칼자루를 다시 집어든 업길은 후다닥 둔봉에게 뛰어갔다. 등과 등을 잇대고 서서 속삭였다.

언니! 저놈 아무래도 강무혁 같소.”

야차 귀신 강무혁?”

.”

이런 우라질! 잘못 본 것은 아니고?”

틀림없소. 오래 전 산으로 들어간 황진기를 빼고, 본국검을 저토록 완벽하게 소화해 낼 사내는 조선 팔도에 강대건과 강무혁 부자뿐이오.”

다들 튀어!”

둔봉의 말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섯 사내는 왔던 길을 정신없이 되짚어 달렸다. 한창 칼부림을 하다 느닷없이 줄행랑치는 왈짜패의 뒷모습을 운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무혁이 반쯤 넋을 놓고 선 운해에게 물었다. 서둘러 정신을 수습한 운해는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부터 하였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무혁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운해 곁으로 다가갔다. 소저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무탈합니다.”

운해는 숙였던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우물처럼 깊은 먹빛 눈동자가 운해를 향해 곧이곧대로 들이닥쳤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무혁의 눈빛이 몹시도 강렬하다. 운해의 두 뺨이 저절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가슴이 달았는지도 모르겠다.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예에?”

소저 얼굴에 홍조가 피었습니다.”

, .”

수줍어 고개를 외로 비끼는 운해의 눈길 끝자락에 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상처가 선명한 무혁의 왼쪽 팔을 운해는 저도 모르게 부여잡았다.

세상에! 다치셨습니까?”

별것 아닙니다.”

급한 대로 소녀가 상처를 살피겠습니다.”

살짝 스친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무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이야기하였다. 치료를 물리는 무혁의 말은 들은 척도 없이 운해는 당장 머리댕기를 풀었다. 상처 자리를 힘주어 꽁꽁 동여맸다.

우선 지혈부터 하겠습니다.”

칼날이 옷자락에 감겨 깊이 들어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의원에게 보여야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보다 더한 상처도 숱하게 입었는걸요. 화살에 다치고, 창검에 찔리고.”

나지막이 흐르는 무혁의 목소리에 다사로움이 넘쳤다. 운해를 안심시키려 일부러 하는 이야기였다.

운해는 고개를 들어 무혁의 얼굴을 살포시 올려다보았다. 지그시 운해를 내려다보는 짙은 눈동자가 다정하다. 그만 스스러워져서 운해는 다시 또 눈길을 외면하고 말았다.

가슴 한쪽이 욱신욱신 저렸다. 왜 자꾸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지 모르겠다.

의원에게 보이는 게 좋겠습니다. 날도 더운데 상처가 덧나면 큰일입니다.”

별것 아니래도요. 벌써 피도 멎었습니다.”

무혁이 작은 소리로 하하 웃었다. 타고난 성품이 다정다감한 듯하다. 그렇다고 만만히 볼 인물은 아닐 것이다.

무소뿔을 깎아 만든 흑각궁 하나로 칼자루 다섯을 너끈히 물리친 솜씨가 아니던가.

안하무인이던 왈짜패가 강무혁이라는 이름 석 자에 놀라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칼잡이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눈에는 한낱 저잣거리 협객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무혁이나 둔봉 무리나 비슷비슷한 왈짜인 것을.

운해는 공연히 마음이 쓰였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해도 좋았다. 재주 많은 무혁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은 협객이십니까?”

운해의 질문에 무혁이 한쪽 눈썹을 비딱하니 꺾었다.

글쎄요. 왜 물으십니까?”

궁금하여서요.”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힘으로 남을 구하는 것을 협이라 하였으니, 소저에게만큼은 내가 협객이 맞겠지요.”

왜 하필 협객이 되려고 하십니까?”

딱히 협객이 될 마음은 없습니다만.”

공명을 떨치는 데는 다른 길도 많습니다.”

내가 공명을 떨치고자 소저를 도왔다 여기십니까?”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행색을 보아하니 번듯한 양반가의 자제 같으신데…….”

운해의 조심스러운 말소리를 무혁이 정색까지 하며 재우쳐 잘랐다.

명문세도가 자식이면 어떻고, 저잣거리 왈짜면 또 어떻습니까. 신분에 따라 뭐가 달라지기라도 한답니까?”

아닙니다. 그저 도련님의 좋은 재주를 좋은 곳에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을 뿐입니다. 금상께서 분명 알아봐 주실 것입니다.”

과거시험이라도 치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미 재주가 출중하니 조금만 더 연마하면 무과에 급제하실 것입니다.”

일없습니다.”

함부로 무지르는 무혁의 얼굴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냉정히 돌아서는 무혁의 전복자락을 운해는 무턱대고 붙잡았다. 가만히 흘려보내는 목소리에 간곡한 진심을 담았다.

좋은 재주를 가지고도 타고난 출신 성분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반상의 구분, 적서의 차별, 당론당색의 장벽에 가로막혀 재주조차 익히지 못하는 이들 또한 한둘이 아닙니다.”

그것까지 내 알 바는 아니지요.”

하늘이 어떤 이에게 좋은 재주를 내렸을 때는 출세하여 혼자만 잘 먹고 잘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이니까요.”

운해는 잠시 말소리를 그치고 무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구하듯 한참을 응시하였다.

무혁은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선이 굵은 입술을 앙다물고 서서 파르라니 솟은 눈길마저 먼 곳에다 두었다.

어쩔 수 없이 운해가 재차 설득에 나섰다.

좋은 재주를 가지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맡은 바 책무를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부디 좋은 재주를 좋은 곳에 써 주십시오. 백척간두에 서 있는 조선을 위하여, 이 땅의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하여.”

그제야 무혁의 시선이 운해 쪽으로 향하였다. 무혁은 전복자락을 움켜쥔 운해의 두 손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하르르 떨리는 여린 손가락의 진동이 고스란히 무혁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다섯 해 전 한주의 죽음과 함께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여긴 심장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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