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서리 04


무혁은 한차례 더 화살촉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날 한주의 가슴에서 빼낸 뒤로 한시도 떼어놓지 않고 품에 지녀온 녀석이었다. 파락호 김치영, 그자에게 복수할 날을 꿈꾸면서…….
싸늘하게 식은 무혁의 입가에 돌연 쓴웃음이 지났다. 치영의 수하에서 온갖 구린 짓을 도맡아하는 둔봉이라는 놈이 똘마니 몇을 거느린 채 시전 한복판을 건들건들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혁은 재빠른 걸음으로 시정잡배 왈짜무리를 따라잡았다.

“둔봉 언니! 오늘 계집년 속살맛 보게 해주는 것이요?”

업길이 꼴딱꼴딱 마른 침을 삼키면서 묻자, 둔봉이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시원스럽게 대답을 했다.

“그깟 속살뿐이겠냐? 음문이고 뒷문이고 네놈 좋을 대로 확 열어젖히거라.”
“그것 참말이요?”

업길이 반색을 하며 다짐을 지우듯이 재차 물었다. 둔봉은 얼굴색을 바꾸고 버럭 성을 냈다.

“이놈아! 내 언제 거짓말 치더냐?”
“거짓말이야 안 치지만, 언니도 가끔 농은 부리지 않소.”
“됐다, 이놈아! 싫으면 말거라. 그년 음문‧뒷문 죄다 나 혼자 먹어버리련다.”
“둔봉 언니! 섭섭하게 왜 이러시오? 나도 농이요, 농. 그냥 한번 해본 소리가지고 이리 나오시면 이 업길이놈 무지 섭섭하오.”

업길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면서 간살을 떨어대자 금세 또 기분이 좋아진 둔봉이 낄낄낄 웃어재꼈다.

“오냐, 그래. 어디 오늘 계집년 속살맛 물리도록 실컷 보자.”

향이가 국밥이 가득 든 나무들통 손잡이를 끙끙거리면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운해는 그 모습이 못내 안쓰러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향이야, 무거울 텐데 같이 들자.”
“됐어라. 아기씨한테 이것 들게 했다가는 엄니한테 이년 맞아죽어라.”
“유모가 모르면 그만 아니냐? 수표교 근처까지만 같이 들고 가자.”
“그래도…….”

헤헤 하고 웃으며 말꼬리를 흐리는 향이의 모양새가 그다지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운해는 얼른 들통 손잡이로 오른팔을 뻗었다.

“같이 드니 한결 가볍지?”
“예. 저기, 아기씨!”
“응, 왜?”
“지난번 그 일은 남산골 나리께 말씀드렸어라?”
“엊그제 시전 점방에 나오셨을 때 얘기했어. 고모부님이 많이 놀라시더라. 홍석 오라버니가 불량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는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밤늦도록 과거공부에 열심이라고만 생각하셨던 모양이야.”

운해의 입술에서 나직한 숨이 새어나왔다. 며칠 전 운종가(종로네거리) 한복판 포도청 포도군사들과 시비가 붙은 왈짜패 속에서 고종사촌인 홍석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그냥 모르는 척 하지 그러셨어라?”
“어떻게 보고도 모르는 척을 해? 단순한 무뢰배 왈짜도 아니고 딱 보니 검계(조선시대 폭력조직) 같던데. 향이 너도 봤잖아. 다들 허리에 칼 찬 것. 홍석 오라버니가 무뢰한들이랑 어울리는 것을 알고도 고모부님께 고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야.”
“그것이야 그렇지만서도……. 그날 남산골 큰도련님이 나리나 마님께 고해바치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잖어라. 해코지라도 당하면 참말로 어쩌시려고 이러시어요?”
“내가 해코지를 왜 당해? 홍석 오라버니가 겁주려고 그냥 한번 해본 소리일 것이야. 고모님이나 고모부님이 알면 당연히 혼쭐이 날 테니 더럭 겁이 났던 게지.”

향이가 엷은 탄식과 함께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기씨는 너무 순진하시어라. 요즘 저잣거리 검계 무뢰배들이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시죠?”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향이의 말소리에 발끈한 운해는 목소리를 까칠하니 높였다.

“기생집을 제 집 드나들 듯 하고, 박장에서 노름으로 돈 번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이래서 아기씨가 순진하다는 것이어라. 그깟 오입질에 투전판에서 뒹구는 것은 새 발의 피라고요. 그것들이 괜히 옆구리에 칼 차고 다니는 게 아니라니까요. 시전 장사치들한테 자릿세 명목으로 돈 뜯어가는 것은 다반사고, 아무 때나 기방에 쳐들어가 행패부리고, 심지어 대낮에 부녀자를 겁간하기도 한댔어라.”
“세상에! 그것을 관아에서 보고만 있다니?”
“다들 무예가 출중해서 포청 포교(포도부장)랑 포졸은 떡 주무르듯 주무른다잖어라. 게다가 검계 대부분이 명문세가 서얼이거나 돈푼깨나 있는 집 자식들이다 보니, 관아에서도 함부로 못 건드린다고 하더라고요.”
“큰일이다, 큰일. 나라꼴이 어찌 되려고 여기저기서 파락호들이 판을 치는지 모르겠다. 오랜 기근으로 다들 먹고사는 것조차 힘든 마당에, 잘난 부모한테 기대서 무리지어 몰려다니며 갖은 행패나 일삼고.”

운해가 끌끌 소리 내어 혀를 차대자, 향이가 또다시 깊숙한 숨을 쏟아내며 도리질을 쳤다.

“지금 나라꼴 걱정할 때가 아니어라. 아기씨야 말로 참말로 큰일이라고요.”
“내가 왜?”

운해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굴렸다. 향이의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걱정해야 하고, 무엇이 큰일이라는 것인지 당최 모를 일이었다.

“남산골 큰도련님이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그렇지라. 그 괄괄한 성품에 분명 해코지를 하고도 남을 위인인디.”
“홍석 오라버니는 그런 사람 아니야. 향이 너는 모르면 가만히 있어.”
“아기씨야말로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어라. 그날 운종가에서 아기씨 팔목 잡아끌 때, 큰도련님 손목 안쪽에 난 무수한 생채기들 보셨잖어라. 그것이 칼자국 맞거든요. 그 상처가 괜히 거기 낫겠어라?”

운해는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을 꾹 여미었다. 그녀 역시 홍석의 손목에 난 숱한 생채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던 탓이다. 칼로 자해한 흔적이 분명했다. 어려서 장난이 심하기는 했어도 사람을 해하거나 스스로를 해칠 만큼 성정이 포악하지는 않았는데…….
운해가 갑갑한 숨을 밖으로 토해내는 찰나, 시커먼 그림자 여럿이 앞길을 가로막고 섰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난데없는 진신(비 오는 날 신는 신으로 바닥밑창에 징을 받아 징신이라고도 부름)을 딸깍거리고, 알록달록 화려한 옷차림에 여봐란 듯이 허리에 찬 칼자루가 보였다. 시정잡배 왈짜패 검계가 틀림없었다.

“이거, 이거 어째 못 보던 얼굴일세. 이 기근에 주막집 국밥을 들통으로 퍼 나르는 꼴이 돈푼 꽤나 있나본데. 이러면 통행세를 안 걷을 수가 없지.”

운해와 향이는 후다닥 발길을 돌려 무뢰한들을 피해서 다시 길을 잡았다. 왈짜들 역시 빠르게 몸뚱이를 움직이더니 도로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당황한 운해와 향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거려야 했다.

“요것들 봐라, 꼭 비 오는 날 날개 떠는 참새새끼들 같구나.”

무리 중 왼쪽 눈자위 아래 칼자국이 나있는 무뢰배가 낄낄 음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작달막한 키에 아랫배가 불룩하니 살집이 오른 왈짜가 신명난 소리로 받아쳤다.

“그러게 말이요. 둔봉 언니! 이년 저고리를 먼저 벗겨볼까요, 저년 치마를 먼저 들춰볼까요?”
“업길아! 둘 다 벗기고 들춰보자. 그래야 얼마나 떨고 있는지 가늠을 할 것 아니더냐.”

가랑가랑 가래 끓는 듯한 무뢰배들의 흉악한 말소리에 운해는 소름이 끼쳐 올랐다. 본능적으로 팔꿈치 안쪽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왜 길을 막고 이러시오? 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란 말이오!”
“우리 아기씨가 누구인줄 알고 이 행패란 말이오? 사역원司譯院(조선시대 외국어 번역 및 통역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주부 윤지충 어르신의 무남독녀요. 썩 저리 비키시오!”

향이가 나무들통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휴, 겨우 역관 나리 따님이셨어요? 하도 도도하게 구셔서 쇤네는 영상대감 손녀쯤 되시는 줄 알았습니다.”

업길이 목소리를 비비 꼬았다. 그리고 무슨 대단한 농이라도 한 양 낄낄거리며 한바탕 웃어재끼더니, 돌연 정색을 하고서 한쪽 팔을 뻗어 향이를 확 밀쳐냈다. 향이의 몸뚱이가 공중으로 튕겨나가듯 저만치 붕 날아가 흙바닥에 곤두박질을 쳤다. 운해는 내처 달려가 향이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향이야, 괜찮니?”
“예, 아기씨. 이년은 멀쩡해요.”

향이가 손바닥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대답했다. 향이의 안전을 확인한 운해는 얼굴을 돌려 큰 목소리로 핏대를 세우고 왈짜들을 꾸짖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입니까! 길 가는 부녀자의 앞을 막무가내로 가로막고 서다니요. 이것이 어느 나라, 어느 법도란 말입니까?”
“아녀자치고 제법 기개가 넘치는구나. 자고로 여자는 이렇게 앙칼지게 앙탈을 부려주는 맛이 있어야 품는 맛도 크다니까.”

둔봉이 또다시 음충맞은 낯으로 낄낄 웃음소리를 자아내자, 업길이 칼집에 든 칼자루로 운해의 다홍치마를 불쑥 들어올렸다.

“어디 이년 아랫도리 구경이나 좀 합시다.”

화들짝 놀란 운해는 까악 비명을 내지르며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쌩 하니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업길의 옷소매를 관통했다.

“웬 놈이냐?”

둔봉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렇게 말하는 네 놈이야말로 웬 놈이냐?”

머리 위 참나무꼭대기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울렸다. 둔봉은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의 정체를 찾았다. 스무 살 남짓한 사내 녀석이 두툼한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천하태평인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 놈이 딱 그 짝이로구나.”
“송곳니 빠진 늙은 살쾡이가 범이라더냐? 동네 개가 웃는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맹랑하기도 하다. 높은 데 올라앉아있으니 눈에 뵈는 것이 없나보구나. 뭐 모르고 날뛰다가 바지에 오줌 지린다, 이놈아!”
“네 놈이나 피똥 싸지 않게 조심해라.”

젊은 사내는 그대로 몸을 날려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정확하게 업길과 운해 사이를 비집고 선 사내의 손에는 칼자루는커녕 화살도 없이 달랑 각궁 한 자루가 전부였다.

“어린놈이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둔봉이 허리춤에서 칼자루를 빼들자 업길을 비롯한 무뢰배들 역시 뒤따라 검을 뽑았다. 젊은 사내는 각궁의 한쪽 끝을 양손으로 붙잡고서 칼처럼 길게 세웠다.

“겨우 활 한 자루를 상대로 검이 다섯 자루라……. 역시 이 빠진 늙은 살쾡이는 어쩔 수가 없나보군.”
“뭣이라! 사내놈이 말이 많다. 양기는 입으로 뿜는 것이 아니렷다.”

둔봉이 사정없이 칼을 휘둘렀다. 젊은 사내는 정면으로 날아드는 둔봉의 칼을 각궁으로 받아치면서 동시에 오른발을 차듯이 들어올려 몸을 바람처럼 빠르게 휘돌렸다. 이어 사내는 등 뒤로 다가서는 업길의 왼쪽 어깨를 불꽃이 번지듯 맹렬한 기세로 내리쳤다. 업길이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진검이었으면 벌써 팔이 떨어져나갔을 터였다.
절퍼덕 땅바닥에 나가떨어져 곤두박질친 업길은 재빨리 눈꺼풀을 비볐다. 그리고 각궁을 마치 칼처럼 휘두르는 젊은 사내의 절제된 몸동작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대부분의 검객들이 세 번 나아가고 세 번 물러서는 명나라 검법에서 유래한 검보를 사용하는데 반해, 각궁을 든 젊은 사내는 앞으로 나아가는 법도 뒤로 물러서는 법도 없었다. 산처럼 굳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서 한쪽 발을 차듯이 올려 전후좌우로 몸을 돌릴 뿐이었다. 그런데도 사방에 빈틈이 없었다. 적을 마주대하여 숨조차 섣불리 내쉬지 않는 사내는 흡사 숲이라도 된 양 고요하기까지 했다.

한차례 호흡을 고른 젊은 사내가 두 손으로 각궁 끝을 쥔 채 활대를 왼쪽 어깨를 향해 얹었다. 오른쪽 어깨에다 칼을 짊어지고 상대와 마주하는 통상적인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지금은 혁파되어 사라진 장용영壯勇營(정조대왕의 호위를 맡아보던 금군) 무예별감들이 따로 훈련해온 본국검이 틀림없었다. 업길의 입에서 탄식 섞인 혼잣말이 터졌다.

“강무혁…….”

칼자루를 다시 잡아든 업길은 후다닥 둔봉에게 달려가 등을 맞대고 속닥였다.

“언니! 저놈 아무래도 강무혁 같소.”
“강무혁? 그 강무혁?”
“예, 틀림없소. 조선팔도에서 오래 전 산으로 들어간 황진기 빼고 본국검을 저토록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사내는 내 알기로 강일건‧강무혁 부자뿐이오.”
“이런, 젠장맞을! 튀어!”

둔봉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섯 사내들이 왔던 길을 정신없이 되돌아 뛰어갔다.
한창 칼부림을 하다 돌연 몸을 돌리더니 줄행랑을 치고 마는 왈짜패의 뒷모습을 운해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무혁이 넋을 놓고 선 운해에게 말을 걸었다. 이내 정신을 수습한 그녀는 깊숙이 허리부터 숙였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무혁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조금 더 운해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혹여 다친 곳은 없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또 한 차례 고개를 숙였다.

“예, 무탈합니다.”
“많이 놀랐겠습니다.”

무혁이 운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순 허공중에서 두 사람의 눈길이 한데 마주쳤다. 운해는 금방이라도 맞닿을 듯한 흑단같이 짙은 눈동자에 괜스레 두 뺨이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는 무혁의 눈가에 아련 미소가 어렸다.

“소저 얼굴에 홍조가 핀 것이 아무래도 놀라서 열이 나나봅니다.”
“아닙니다.”

수줍어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피하는 운해의 눈에 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그녀는 칼로 베인 자국이 선명한 무혁의 왼쪽 팔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다치셨습니까?”
“별것 아닙니다. 그냥 칼에 스친 것뿐이니 걱정 마십시오.”
“급한 대로 지혈부터 하겠습니다.”

운해는 서둘러 풀어낸 머리댕기로 무혁의 팔을 힘주어서 꽁꽁 동여맸다.

“옷자락에 감겨 칼날이 깊게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피도 곧 멎을 것입니다.”
“의원에게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이보다 더한 상처도 숱하게 당해봤는걸요. 화살에 다치고, 창검에 찔려본 적도 여러 번입니다.”

운해는 고개를 들어 무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진한 눈동자에 풋풋한 미소가 넘쳤다. 돌연 가슴패기가 욱신욱신 아렸다. 운해는 눈동자를 사선으로 비껴 또다시 눈길을 외면하고 말았다. 왜 가슴이 제멋대로 뛰노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의원에게 보이는 게 좋겠습니다. 날도 더운데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별것 아니래도요. 보세요, 벌써 피도 멎었지 않습니까?”

운해의 정수리로 떨어지는 말소리가 참으로 따뜻했다. 꼼꼼히 따져보지는 못했지만 무혁의 인상 또한 선했다. 그러나 만만하게 볼 인물은 아닐 터였다. 겨우 무소뿔로 만든 흑각궁 한 자루로 칼 다섯 자루를 상대한 솜씨가 아닌가 말이다.
불현듯 운해는 둔봉과 업길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던 귀엣말이 떠올랐다. 안하무인이던 무뢰배들이 강무혁이라는 이름 석 자에 놀라 줄줄이 줄행랑친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보아야 저잣거리 협객에 지나지 않았다. 옆구리에 칼만 안 찼다 뿐이지, 무혁이나 둔봉이나 어차피 비슷비슷한 왈짜였다. 운해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쓰였다.

“외람된 물음입니다만 검계…… 아니, 협객이십니까?”
“연암(박지원) 선생께서 힘으로 남을 구하는 것이 바로 협俠이라 했으니, 소저에게만큼은 내가 협객 맞겠지요.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왜 하필이면 협객이 되려하십니까? 공명을 얻는 데는 다른 길도 많을 텐데요. 행색을 보아하니 번듯한 가문의 자제 같으신데.”
“내가 명문세도가 자식이면 어떻고, 저잣거리 왈짜면 또 어떻습니까? 타고난 신분에 따라 뭐가 달라지기라도 한답니까? 내가 아까 그들과 별반 차이 없는 검계라면 소저의 고마움이 반감하나 보지요?”

무혁은 일부러 정색을 하고 물었다. 운해의 본마음을 떠보고 싶은 순간적인 충동 때문이었다. 당황한 그녀가 연거푸 손사래를 쳤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저 좋은 재주를 좋은 데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나라님께서 분명 알아봐주실 것입니다.”
“나더러 무과시험이라도 치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미 재주가 출중하신 듯하니, 조금만 연마하면 무과에 급제도 가능할 것입니다.”
“일없습니다.”

무혁의 얼굴빛이 한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운해는 냉정하게 돌아서서 가는 그의 옷자락을 힘주어 부여잡았다. 그녀는 간곡한 마음을 가만가만 밭아내는 말소리에 담았다.

“좋은 재주를 가지고도 출신성분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반상의 구분, 적서의 차별, 혹은 당론당색의 벽에 가로막혀 재주조차 익히지 못하고 주저앉은 이들 또한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 것까지 내 알 바는 아니지요.”
“어떤 이에게 하늘이 좋은 재주를 내렸을 때는 혼자만 출세하여 잘 먹고 잘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이니까요. 그러니 좋은 재주를 가지고 아무 것도 안한다면 맡은 바 책무를 유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디 좋은 재주를 좋은 데 써주십시오. 백척간두에 서있는 조선을 위해서, 이 땅의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무혁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옷자락을 움켜쥔 운해의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포르르 떨리는 여린 손가락의 진동이 고스란히 그의 가슴패기로 전해져왔다. 이미 다섯 해 전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고 믿은 무혁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by 지아쿨 | 2011/10/06 01:44 | 소설연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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